
시간외근무수당
모리 X 매니저
따사로운 볕이 창가를 두드리는 오후. 테오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다. 양팔을 꼬아 팔짱을 끼고 한 곳만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당장 험한 말을 내뱉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하얗디하얀 와이셔츠 하나. 특이점이 있다면 깃과 소매에 다홍빛 무언가가 묻어있다는 것?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공통된 의문을 가진다. 테오는 왜 나오자마자 기분이 나빠…? 빨리빨리의 민족인 우리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해답은 불과 몇 시간 전 일어난 사건에 있었다.
"대박!!"
평소 일을 크게 벌리기 좋아하는 퀸시의 고의성 다분한 외침은 양치기 소년의 그것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큰소리로 외쳤음에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복도는 마치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 하는 착각까지 들게 했다.
"이거 립스틱 자국 아냐?!"
그러나 물에 설탕을 섞으면 설탕물이 되듯, 기존 물질에 다른 물질을 합성하면 새로운 성질을 지닌 무언가가 탄생하는 법. 찍어 바르는 거라곤 선크림이 전부인 사신 지부에 립스틱의 출현은 다소 강렬한 충격을 몰고 왔다. 그것을 퍼트린 자가 퀸시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어질 정도로 말이다. 알 게 뭐야, 립스틱 자국이라는데!
그리하여 6월 어느 나른한 날에 일어난 소동, 속칭 립스틱 소동은 -작명 센스가 1차원적인 것으로 보아 카티가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시안이 지었다면 작곡가의 센스를 발휘해 루주 소동(from. your lips) 정도의 네이밍이 나왔을 텐데- 오후의 한가로움을 부수고 모든 사신을 모집시키기에 이르렀다.
"우리 중에 그런 취미를 가진 자기가 있단 말이야?"
"사고가 어떻게 돼 먹은 거냐? 지금 말하는 건 여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립스틱이 우리 중 누군가의 옷깃에 묻었다는 거잖아! 여기 립스틱을 쓸 사람이 매니저 말고 누가 있어?"
"샨. 그런 접근은 좋지 않습니다. 샨도 전에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적이 있지 않습니까?"
"뭐? 내가 언… 아! 그건 케첩이 묻은 거라고 몇 번을 말하냐! 카티 녀석이 오므라이스에 내 얼굴을 냅다 박았다고!!"
"후후… 과연 그럴까요."
격해지는 언쟁에 불안한 기색을 보이던 데이가 주제를 바꾸고자 입을 열었다. 옷은! 옷은 누구 건지 알아냈엉?! 그 말에 퀸시는 아니라고 대답한 뒤 셔츠에 코를 박고 연신 킁킁댔다. 더러워…. 테오는 끔찍한 광경을 마주한 사람처럼 질색했다. 아무 이유 없이 남이 입었던 옷 냄새를 맡다니. 저건 이유가 있어도 용납할 수 없어. 다행히 테오의 반응을 보지 못한 퀸시는 특정인의 향수 냄새는 나지 않는다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그가 질색하는 테오를 보았다면 가슴팍에 셔츠를 던지는 악행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임무를 갔다가 묻은 게 아닐까요? 에… 엣취!"
"그렇다고 여기기엔 우린 임무 나갈 때 제복을 착용하게 되어있고, 외출도 사감님께 미리 보고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근래엔 보고한 사람이 없지 않나요?"
"아, 그건, 엣취! 엣취!"
"엘은 그냥 들어가 있어요. 재채기하다가 골로 가겠네."
최근 일주일간 외출이 있던 사람은 사신 20명은 물론 매니저와 세이 사감을 포함해 0명인 지금. 마지막으로 빨래 더미가 쌓여있던 날은 목요일. 즉, 이 말은 립스틱 자국이 묻은 와이셔츠가 나온 지 나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단 뜻이다. 저마다 시선 교환이 오간 후 잠시 정적이 깔렸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제일 먼저 상황 파악을 마친 유세프는 퀸시 손에 든 와이셔츠를 받아들어 자세히 살폈다.
"립스틱은 확실한 거야?"
"논논이가 흙 묻은 발로 찍은 거 아니에요?"
"그럼 리히트가 분명하다."
"지부에 들어온 뒤로 키르 자기가 이렇게 빨리 말하는 거 처음 봐. 너무한 거 아냐? 논논 자기가 날 그 정도로 싫어하진 않아!"
"아니! 이걸 흙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어. 내가 그 이유를 말해주지. 우선 흙은 면과 닿는다고 변색되지 않아. 섬유질에 폴리에스테르가 섞였대도 별반 다를 건 없어. 그것도 이런 다홍빛으로 말이지. 그리고 컴퓨터보다 정확한 내 분석에 의하면 이 유성 매직처럼 그은 듯한 강렬한 색상은 립스틱일 확률이 99%야. 어떻게 이런 값이 도출됐는지 궁금해?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척 보기만 했는데도 척척 답이 나오니 경이로울 만도 하겠지. 뭐, 내겐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야? 바쁘고도 천재인 시릴 님이 넓은 아량을 베풀어 자세히 설명해줄 테니 다들 집중해! 자,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건 립스틱의 구성 성분이야. 인간계의 립스틱은 대부분 유분이 있는데 이건 명계의 립스틱도 동일해. 입술이 반들거리면 도톰해 보이는 동시에 촉촉해 보이는 효과를 주기 때문에 유분을 넣기 시작한 거야. 그리고…."
"어우, 넌 맨날 기계 만지더니 입에 모터를 달았니? 아무도 안 물어봤으니까 조용히 좀 해!"
"뭐?! 누군 듣고 싶어도 못 듣는 분석이야! 해 준다고 할 때 듣는 게 좋을걸?"
"앞으로도 듣고 싶을 일 없거든?!"
"여기서 저희가 중점을 두는 건 와이셔츠인가요, 립스틱인가요? 제 생각엔 립스틱 같지만, 혹시 모르니 정확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네요."
"이 옷의 주인을 찾은 후 이야기를 들어보면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닌가?"
"넌 단순해서 좋겠군. 지금 이 상황에서 주인이 잘도 나올 거라 생각하는 걸 보니."
"그럼 립스틱인가요?"
재차 강조하는 모리의 질문에 꼿꼿하던 몇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에단의 말대로 여기서 저 옷이 내 옷이오 하고 나올 바보는 없으니 저쪽을 알아낸 건 가망이 없다. 립스틱이라면 간단하네요. 매니저님은 현재 도서관에서 독서 중이시니 가서 답을 여쭈면 되겠네요. 명쾌하지만 실행하긴 어려운 엉터리 대답에 시안이 버럭 화를 냈다. 말로는 뭔들 못하리.
그걸 어떻게 대놓고 묻냐! 모리는 왜 안 되느냔 표정을 하고선 고개를 갸웃했다. 제 입장에선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매니저님과 사신을 차별하지 않는 사신이 어디있겠느냐만, 와이셔츠까지 펄럭이며 주인을 찾는 것과 물음 하나도 조심스러워하는 건 너무 극명한 차별 아닌가. 맞춤 정장보다 까다로운 사람들이라고 모리는 생각했다.
매니저님께 실례가 될 것 같아 꺼려진다면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모여드는 시선에 모리는 다시금 영업용 웃음을 장착하고 검지와 엄지를 동그라미 모양으로 말았다. 어쩜 이리 대놓고 말하는 것보다 잘 이해되는 비언어적 표현이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모리의 행동은 명확한 뜻을 담아냈다.
"여러분이 원하는 답은 제가 제공하겠습니다. 정확한 값은 의논을 통해 정해보도록 할까요?"
"참나, 네가 그럼 그렇지. 기대한 내가 바보다! 돈은 고사하고 무슨 수로 네가 그걸 알려줘? 차라리 매니저한테 직접 묻는 게 낫겠네!"
"음― 그런가요."
그때부터였을까. 매니저 곁에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의 눈빛으로 맴도는 사신들이 생겨난 것이.
*
색이 바랜 서적 몇 권을 들고 본관 복도를 거닐던 매니저는 심상치 않은 낌새에 주위를 살폈다. 오늘도 역시나. 저 뒤에서 복도 창가를 올려다보고 있는 건 퀸시. 적어도 제가 아는 퀸시는 이렇게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것도 자신이 복도를 거닐 때만 나타날 정도로 말이다. 매니저는 흐응, 하고 뒤돌아서 퀸시를 바라봤다.
"퀸시."
"어, 매니저! 여기서 마주치다니 별일이네!"
"본관 복도에서 마주치는 게 뭐가 별일이야."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던 퀸시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러게? 매니저는 수상하단 얼굴을 하면서도 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알려주지도 않을뿐더러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건 비단 퀸시만이 아니었기에 일일이 신경 쓰기 힘들었다. 누구 하나를 꼽을 수 없게 모두가 이랬다. 정말 모두가.
얼마 전 시안도 갑자기 도서관을 쾅― 열고 들어와선 자기가 더 놀란 얼굴로 여기 있었냐며 말을 붙여왔었다. 그리곤 옆에 앉아 책을 읽는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데, 무슨 일이냐고 몇 번을 물어도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젓는 것이었다. 뒤이어 나타난 아이타치와 카티도 시안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니, 매니저는 결국 읽던 책을 덮어야 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님 할 말이라도 있어?"
"군사님! 날이 참 좋소."
그걸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거 아냐. 말똥말똥 눈을 빛내던 아이타치와 카티는 얼마 못 가 제 옆자리에 자신이 앉겠다고 싸우는 바람에 둘을 어르고 달래느라 질문은 흐지부지 무시당했다. 눈앞에 퀸시는 말해서 뭐 하나. 곧이곧대로 말해줄 위인이 아니다. 지금도 저렇게 티 나게 따라오면서 말은 섞지 않으려고 하니 매니저는 답답함에 머리가 빙글- 돌 지경이었다.
가끔가다 한 번씩 이상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최근 일어나는 요상한 일도 그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간혹 테오가 물어온 질문이라든지, 준이 물어온 질문이라든지 말이다.
'매니저님… 전에 포장된 립스틱 상자를 들고 계시던데 받으신 건가요?'
'아, 그거? 내가 주려고 산 거야. 지인분께 감사 인사드릴 일이 있어서.'
'매니저님, 여기에 지인도 계십니까?!
'뭐야, 나도 지인 있거든? …이번에 인사 드릴 건 옆 지부 사감님이지만.'
그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다시 생각하니 갑자기 나온 것치곤 참으로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그저 그렇게 마무리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에 사신들이 달려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벼운 논쟁으로 한눈을 판 사이 없어진 와이셔츠. 에단의 예상대로 모든 이야기를 들은 옷의 주인이 가져간 것이 틀림없었다. 남은 것이 없어 이대로 미제에 빠지나 싶던 찰나, 금안을 살짝 빛냈다 닫은 모리가 대뜸 발언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키스 데이였네요.
그 한 마디가 조용한 사신 지부에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왔는지. 그날을 기점으로 매니저에게 기웃대는 사신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니저는 속 편한 제이미의 제보에 조용히 분노했다. 모리… 너 두고 보자….
훗날 모리가 변명하길 자신은 문득 떠올라서 한 것뿐이라며, 매달 기념일로 보람찬 상반기였는데 6월이 너무 심심하게 됐다. 아쉽지만 기념일이 키스데이인 만큼 연인들에게 양보해야 하나 보다. 라는 의미로 한 말이라고 했다. 하필 그런 말을 그런 타이밍에, 모리가 했다는 것부터 신뢰성이 바닥이었지만 아무튼 본인은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립스틱 소동은 어떻게 되었느냐. 이야기의 결말은 뒷심이 부족한 작가가 쓴 일일드라마처럼 허무하게 끝났다. 핵심 문장은 단 두 개. 아니, 세 개인가?
'매니저님, 그럼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사람 있으세요?'
'좋아하는 사람? 난 너네 좋아하지~'
'매니저님…!!'
마지막 문장은 핵심이라고 하긴 부족하듯 싶으나 저 말을 들은 테오가 이후에 매니저에게 들어오는 모든 관련 질문을 차단했기에 어떤 관점으로는 핵심으로 볼 수도 있겠다. 립스틱은 옆 지부 사감님 드릴 거고,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한 사신)라고 하셨으니 더 이상 파헤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매니저님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아니라면 아닌 거지. 내 매니저님이 거짓말을 하실 리 없잖아?
"결국 와이셔츠와 립스틱 모두 알 수 없게 되었군요. 후후."
"제이미 님 말대로 진짜 흙인 거 아닐까요?"
"아니라니까! 내 데이터에 의하면…!"
"그럼 유성 매직 아니냐? 유성 매직을 그은 듯한 색이라며."
"그건 비유법이지. 형은 작사가가 그것도 몰라? 립스틱일 확률이 99%라고 한 건 잊었어?"
"나머지 1% 확률은 왜 빼냐? 1% 확률로 유성 매직인가 보지.“
"잘난 척이란 척은 다 하더니 꼴좋다! 캬항!"
"아, 흙 아니라고, 그거!!!"
*
어둠이 깔린 사신 지부. 곳곳을 밝히는 불빛 가운데 매니저 룸 앞에 멈춰 선 남자는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김없이 야근이시네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보고서 가득 해석 불가능한 욕을 적어대던 매니저가 시선을 옮겼다. 그는 돌연 나타난 존재에도 놀라는 기색 없이 무감했다.
"왔네."
오히려 그가 오기만을 기다린 눈치였다. 기다리셨나요? 매니저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엄청 기다렸지. 내가 아주 뒤집어질 소리를 들었거든.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발음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매니저가 분노하고 있음을 깨닫게 했다.
"그 소린 왜 했어."
"무슨 소리요?"
"후… 모른 척할래? 키스데이니 뭐니 그런 소릴 왜 했냐고. 완전히 꺼져가는 불씨에 마른 장작 땐 격이잖아!"
"그래서 들켰나요?"
"당연히 아니지."
"조금은 들켰으면 싶어서 흘린 건데, 아쉽게 됐네요."
"나를 통해서 들키는 거에 내 의견은 없네?"
"들키게 되면 매니저님 탓도 조금은 있지 않나요? 애초에 제 와이셔츠에 묻은 립스틱도 매니저님이,"
"그건 모리가 갑자기 움직여서 그런 거잖아."
"전 매니저님이 숨 고르기가 버거워 보이셔서 도와드린 겁니다."
"얼씨구? 도와준 대가로 날 팔아넘긴 거고?"
"대가는 지금 받으러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리는 모리의 행동에 매니저는 마주한 눈을 급히 피했다. 따지고 있는데 저런 말을 잘도……. 귀가 후끈 달아올랐음은 안 봐도 뻔했다. 매번 이렇게 넘어가니 계속 장난치지. 마음 같아선 모리의 적금 통장이라도 훔쳐 마계 깊숙한 곳에 숨겨버리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매니저가 모리를 너무도 사랑했다. 아마 상상을 현실로 실현시킨다면 마계에 발을 딛는 건 모리가 아니라 매니저일지도.
모리는 여전히 저를 노려보는 불만이 가득 담긴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섰다. 그러다 가자미가 되셔도 손해배상은 해 드리지 않아요.
"그리고 대가도 드리러 왔습니다."
"무슨 대가."
"본인이니 제일 잘 아시겠지만, 야근에 대한 시간외근무수당을 받으셔야죠."
"내 야간 수당?"
"네. 권리는 중요하니까요."
"흐음― 그건 맞는 말인데, 모리랑은 상관없는 일 아닌가?"
"오늘따라 안 넘어가 주시네요."
"오늘따라 얄미워서."
"제가 한 말 때문에 주말에도 시간을 할애하셨으니 제게도 책임이 있는 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여간 말은."
"제가 드린 립스틱은요?"
"있지. 누가 준 건데."
"역시 매니저님은 다홍색이 잘 어울리시네요. 오늘은 묻지 않게 부탁드려요."
"잠깐만. 문 잠갔나?"
"아까 들어오면서 제가 잠갔어요."
"참고로 주말이나 야간 수당은 1.5배인 거 알지?"
"당연하죠. 그래서 지금 왔는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