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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림

노아 X 매니저

- 현대 AU, 작중 노아와 매니저는 20살.

- 두 사람의 과거 및 가족관계 등 여러 가지 날조 존재.

 

 

   으음. 노아는 현재 백화점 내에 자리한 화장품 가게에서 허리에 손을 짚은 채 고민에 빠져있었다. 입학 후 여러모로 바빴던 탓에 5월에 있던 성년의 날이나 제 생일 같은 경우 어영부영 지나갔으나, 지금은 종강 이후 나름 여유로운 시기인지라 매니저의 생일만큼은 제대로 챙겨주고 싶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정한 선물이 립스틱과 꽃, 그리고 향수였다. 이 세 가지는 성년의 날 주는 선물과 똑같았다. 아, 하나만 달랐다. 당연히 키스 대신 립스틱이었다. 사귀지도 않는데 미쳤다고 주겠나. 자신이 아무리 매니저를 오랜 시간 바라보고 있었다지만 지켜야 할 선은 당연히 지키는 게 예의였다. 물론 주면 좋겠지만…. 노아는 의식의 흐름에 생각을 맡기다 스스로 화들짝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그나저나 꽃과 향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화장품은 실제로 사용하는 색을 선물해줘야 그 선물을 주는 의미가 있을 텐데…. 하지만 자신은 화장품에 대해 아는 거라곤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검지로 뺨을 톡톡 치며 고민하다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통화를 걸었다. 지금 시간쯤이면 고등학생도 학교가 끝났을 터였다. 아, 방학했으려나? 노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뚜르르, 뚜르르르. 신호음이 계속 이어지기에 그냥 끊을까 고민하던 찰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노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뭐야, 형이 웬일로 나한테 전화를 했어?”

   “시노, 오래간만이야.”

   “그러게. 이사 가고 소식도 없었으면서 나한테 전화를 했네? 형은 우리 누나만 있으면 다야?”

 

   시노의 가벼운 툴툴거림이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노아는 그것이 참 귀여운 투정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미안, 다음에 한 번 놀러 갈게. 그런데 혹시 너희 누나 립스틱 뭐 쓰는지 알아?”

   “그런 걸 왜 나한테 묻는데,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잖아.”

   “하긴 그런가, 하하.”

   “어휴, 형은 항상 속도 좋더라, 누나가 다른 형들한테 찐하게 고백받을 때도 그냥 보기만 하고.”

 

   시노의 뼈 있는 말은 노아의 정곡을 푹 찔렀다. 그것도 아주 깊게 찔렀다. 노아는 제 명치 한구석이 아리다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사실 맞는 말이었기에 딱히 변명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저는 매니저와 10년이 넘도록 알고 지냈기에 주변에서 보기엔 거의 친남매나 다름없었고, 허구한 날 서로의 집에 드나들었다. 그 탓에 매니저의 두 동생인 시노와 레비조차 노아를 거의 친형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시노는 장장 10년 넘게 이어져 온 노아의 짝사랑이자 첫사랑을 알고 있었고, 그를 조금은 안타까워했다. 왜냐면 그는 누나를 정말 아끼고 좋아했기 때문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와 그의 동생인 레비는 허구한 날 싸우기 바쁜 남매들과 달리 제 누나를 무척이나 아꼈다. 누나인 매니저도 3살과 10살 차이가 나는 동생들을 아끼고 보듬어주었다. 그렇기에 시노는 나중에 누나가 애인이라고 데려오는 사람 모두를 쉽게 용납할 생각은 없었다. 누구를 데려오든 누나가 백 배, 천 배, 아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더 아까울 것이다.

 

   하지만 누나에 대한 일이라면 그렇게 깐깐한 시노의 눈에도 노아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었다. 가끔 기척 없이 뒤에서 나타나 인사하는 바람에 제가 깜짝 놀라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 빼고는 말이다. 얼굴? 얼굴이야 누나가 정말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가끔 이 연예인 잘생기지 않았냐며 휴대전화를 들이밀어 사진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노아와 판박이로 닮아 있었다. 그리고 제 누나와 노아 형은 아침마다 함께 등교했는데, 언제나 형이 먼저 나와 있었다. 시노는 가끔 일찍 일어나 제 누나가 지각하는 모양새는 본 적이 있어도, 그 형이 집 앞에서 기다리지 않은 날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매번 그러기도 힘들 텐데 언제나 누나를 배려하는 게 뻔히 보였다.

 

   그렇게 시노의 까다롭고도 먼 기준선을 자신도 모르게 넘은 노아가 그저 웃음만 흘리자, 시노는 한숨을 푹 쉬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 내가 지금 누나 자주 쓰는 립스틱 색깔만 찍어 보내줄게. 어차피 누나한테 선물할 거 아니야?”

   “으응? 그렇지.”

   “색깔만 대충 보여주면 직원들이 알려주던가 할 것 같은데. 그 정도면 되지 않나?”

   “그러면 되겠다, 고마워. 다음에 형이 아이스크림 사 갈게.”

   “패밀리로 사 와. 더 큰 것도 좋고.”

   “알았어, 알았어. 고마워~”

 

   노아는 통화종료 버튼을 누른 뒤, 시노에게 사진이 오기를 기다렸다. 5분쯤 지났을 무렵, 카톡으로 아무 말 없이 사진 하나만 덜렁 도착했지만, 노아는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화면에 사진을 띄운 뒤, 직원에게 내밀며 친구가 이 색을 사용하니까 이거랑 비슷한 색깔로 보여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직원은 자본주의용 미소를 띠며 립스틱 가판대 쪽으로 노아를 이끌었다.

 

 

 

* * *

 

 

 

   매니저는 현재 노아의 자취방에 놓인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물론 반년 전까지만 해도 제 옆집이었다. 하지만 노아네 부모님께서 노아가 대학에 붙자마자 해외여행을 떠나시며 본가는 빠르게 처분해버리셨다. 대신 대학 근처에 노아가 살 집을 하나 구해주셨고, 노아는 별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뒤로 이상하게 노아의 자취방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어 약간 어색했다. 그 탓에 평소 같았으면 침대에 누워 노아를 기다렸을 그가 차마 그러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다.

 

   “언제쯤 오려나……”

 

   집에 들어오기 직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매니저는 엄마가 싸 준 반찬을 들고 초인종을 눌렀었다. 노아는 원래 집에 있으면 누구세요, 라고 묻는 느긋한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오는 편인데, 그 목소리가 안 들리는 것을 보아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고로 매니저는 노아에게 전화를 걸었고, 몇 번의 연결음이 들리다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들리는 목소리에 매니저는 반찬 전해주러 왔는데 어디를 갔냐 물었고, 역시나, 바깥에 있다고 했다. 노아는 비밀번호 네 자리를 알려주며, 자기는 도착하려면 20분은 더 있어야 하니 제게 먼저 들어가는 것을 권했다. 그리하여 매니저는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집주인 없는 집에 앉아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공간이 낯선 건 낯선 거였고, 심심한 건 심심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방을 전과 다르게 꾸몄을까, 궁금해져 매니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찬찬히 둘러보니 방 안에 있는 가구는 책상과 침대, 옷장과 같은 색의 책장이 전부였다. 딱히 다른 건 없어 보였다. 책상 쪽으로 걸어가니 전공 서적들이 책상 아래에 마구잡이로 쌓여있었다. 얘는 종강한 지가 언젠데, 전공 책을 아직도 이렇게 쌓아뒀대. 어릴 적, 노아의 책장을 가끔 정리해준 기억을 떠올리며 책 몇 권을 들어 올렸다. 그런 뒤 책장에서 텅 빈 칸 하나를 찾아내 책을 가지런히 꽂아 넣었다. 예전에 정리했을 적에도 별말을 하지 않았으니 자신이 정리해도 괜찮을 것이다. 매니저는 그리 생각하며 열댓 권의 책을 정리한 뒤, 바로 옆 칸에 놓인 액자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놓여 있는 액자는 총 다섯 개로, 두 개는 노아네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매니저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라 괜히 반가워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침 또 옆에 놓인 액자는 매니저 자신과 노아가 어릴 적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와, 나 이때는 머리 길었구나. 저렇게 땋았는데도 길게 내려온 거 보면…”

 

   낯을 가리는 듯 시선을 묘하게 피하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노아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웃음을 지은 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매니저가 지금 사는 집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인 것 같았다. 노아와는 한 달이 되지도 않아 친해졌으니까. 사진 속 그의 자줏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고 있었고 옅은 녹색의 눈동자는 빛을 내고 있었다. 참, 노아는 눈동자가 예뻐. 어릴 적 놀이터에서 그 녹안을 마주친 기억은 아주 생생했다. 무려 10년이 더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어린 시절의 일임에도 여전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 * *

 

 

 

   매니저가 기억하는 그 날은 이맘때였던 것 같다. 그날,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인 어머니가 집안을 한 번 싹 청소하고 싶다며 옆집에 놀러 가 있는 건 어떻냐 물으셨었다. 함께 놀 사람인 시노는 곤히 자고 있었기에, 매니저는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수긍했다. 문제는 집을 나선 후였다. 매니저는 옆집 초인종을 누르기엔 용기가 나질 않았다. 새로운 환경, 그리고 새로운 사람에 대해서 낯을 엄청 가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망설이던 때, 옆집의 문이 달칵 열리며 누군가 나왔다. 매니저는 화들짝 놀라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섰고, 안에서 나온 사람과 마주쳤다. 이사 왔을 때 인사하고 마주친 적이 없던 노아였다. 노아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안녕?”

 

   노아의 입꼬리가 배시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옅은 녹색의 눈동자가 짙은 밤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매니저는 눈을 껌뻑이다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문을 열었다.

 

   “안, 녕.”

   “왜 여기에 서 있던 거야?”

   “…엄마가, 청소한다고, 옆집 가서 놀라고 하셨어.”

 

   아하. 노아는 매니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매니저는 왜 그러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지금 놀이터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갈래?”

   “어어, 그래.”

 

   얼떨결에 대답해버린 매니저의 손은 노아에 의해 잡혔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손이 부분부분 딱딱하다는 걸 알아챈 매니저의 입에서 질문이 절로 흘러나왔다.

 

   “노아는 손이 딱딱하네…”

   “응, 유도하거든.”

   “대단해.”

   “고마워.”

 

   그 이후 놀이터에 도착할 때까지 아이들의 대화는 단절되었지만, 매니저는 마음이 무언가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말 몇 마디가 오갔을 뿐인데 노아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렇게 놀이터에 도착했건만 매니저는 그저 그네에 앉아 왔다, 갔다를 반복하다 결국 눈을 감았다. 한 학기가 끝난 채 이사 왔기에 새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정말 어려웠고, 새로운 환경마저 너무 어색했다. 매니저는 그전에 살던 동네의 친구들이 조금 그리워졌다. 그때였다. 다른 아이들과 잠시 떠들던 노아가 그네에 앉아 있는 매니저에게 다가왔다.

 

“매니저, 내 친구들이랑도 같이 놀지 않을래?”

 

그때 마침 뜨거운 여름 햇살이 노아의 등 뒤에서 비쳤고, 그 바람에 매니저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가 떴다. 그러자 노아의 녹색 눈동자와 매니저의 밤색 눈동자가 다시 한번 마주쳤다. 어, 어…. 매니저는 절로 말을 잃었다. 눈이 아릴 만큼 잘게 부서지는 햇살, 영롱하게 빛나는 라임 색의 눈동자, 얇게 휘어진 눈꼬리, 거기에 환한 미소까지. 어린 소녀의 마음속, 한 사람이 자리 잡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그땐 그랬지~”

 

   매니저의 입에선 가벼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낯을 가리던 어린아이는 어느새 커서 사교성이 풍부한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첫사랑은 여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뭐랄까, 이제는 일상 같았다. 그 아이를 바라보고, 좋아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저 친구로만 대하는 것이 말이다. 자랄수록 아이들 사이에 녹아들었고, 자연스레 내면을 숨기는 것에도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긴 신조가 하나 있었다. 노아와 함께일 때 감정은 잘 드러내고, 속내는 꺼내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함께 한 친구를 잃는 것은 정말 싫었다. 그냥 잃는다는 일의 도입부조차 마주하기 꺼려졌다. 그랬기에 눈 하나 깜빡 않고 거짓을 뱉어내곤 했다. 노아도 아마 자신의 마음을 모를 것이다. 매니저 자신도 가끔 헷갈리는 마음인데 타인이 어떻게 알아차리겠는가.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액자들로 시선을 옮겼다. 각각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때 같이 찍었던 졸업식 사진이었다. 중학교는 자신이 여중을 갔기에 졸업식을 따로 해서 꽂아두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참, 얘도 꽂아둘 사진이 그렇게 없었나? 왜 나랑 찍은 것만 놔뒀지? 의문을 가지려던 찰나, 집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매니저는 후다닥, 방에서 빠져나와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고 노아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노아, 왔어?”

   “응, 어디 다녀오느라… 미안, 반찬만 넣어두고 가도 될 텐데.”

   “에이, 아니야. 오래간만에 얼굴도 볼 겸 해서 기다린 거야.”

   “그렇구나, 뭐 먹고 갈래?”

   “됐어, 나 가족들이랑 약속 있어서 나가 봐야 해.”

 

   노아는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매니저의 시야에 노아가 보이지 않게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매니저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뱉었다.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응? 별거 아니야.”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산뜻한 미소를 띠며 하하,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진짜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었다. 스치듯 봤지만, 봉투에 새겨진 건 화장품 브랜드의 로고였다. 노아를 지켜본 지 장장 12년, 매니저는 노아가 여자와 관련된 걸 사 오는 걸 보지 못했다. 그런 그가 립스틱으로 유명한 브랜드의 종이가방을 들고 있다? 그렇다고 이모가 한국에 계신 것도 아니고-노아와 친해진 이후 노아네 부모님을 이모와 삼촌이라 칭한다-, 옆집 생일을 다 알고 있어 떠올릴 수 있었던 이모 생신도 아니었다.

 

   그가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노아에게 여자가, 생긴 것 같았다. 대체 누구지? 매니저가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 할수록 힘이 빠졌다. 물론 제가 노아의 옆에 계속 머물리라 생각하는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은 노아가 누군가를 사귀지 않아 왔기에 자신도 종종 받는 고백을 거절하며 살아왔다. 아주 자그만 희망 정도는 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노아가 아니면 굳이 사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만일 애인이 이성 친구인 노아와 연락을 계속 주고받는 걸 보기 싫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싫었다. 남자친구에게 노아가 연애에 방해되는 이성 친구 정도로 취급당하기엔 매니저 자신에게 너무 소중한 친구였다.

 

   그래서 제 마음을 꼭꼭 숨겨 자신도 헷갈릴 만큼 깊숙한 곳에 넣어뒀던 건데. 이런 날이 올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몰랐다. 물론 빠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매니저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슬슬 매니저의 이성과 감성이 따로 놀기 시작했다. 그래서 표정은 여전히 밝았지만, 말투가 순간적으로 삐딱하게 튀어 나갔다.

 

   “그렇구나, 알았어. 갈게.”

   “으응? 잘 가~”

 

   노아는 매니저의 말투가 조금 딱딱해진 건 알았지만, 갑자기 저러는 이유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매니저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인사를 했지만, 뒤로 돌아 자취방을 빠져나오자마자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연인과 친구라는 이름 아래, 동시에 서 있고 싶다면 그건 너무 과한 욕심인 걸까?

 

   에휴. 매니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터덜터덜, 제 가족들을 만나러 발걸음을 옮겼다. 매니저는 오늘따라 더 쓸쓸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운 7월의 밤하늘이 짙어져 갔다. 오후 11시, 매니저의 생일도 끝나갈 무렵에 매니저는 제 친구들과 다시 한번 시원하게 소주잔을 부딪쳤다. 그리곤 쭉, 들이켰다. 술이 참 달았다. 매니저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든 걸 제외하곤 새빨갛게 물든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술 대신 안주를 주워 먹고 있는 친구들은 이미 그가 취한 걸 알아챘다.

 

   “아, 그래서… 내가 오늘 이렇게, 마시고 있다… 이 말이야…”

   “그랬구나.”

   “하여간, 노아 걔는! 어? 짜증 나… 얼굴은 내 취향인데 성격도 내 취향인데… 그런데 어? 난 걔 친구야, 흐엉…”

 

   그렇게 얘기해달라 해도 죽어도 털어놓지 않던 이야기를 저 혼자 줄줄 내뱉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부터 하교 시간만 되면 교문에서 매니저를 기다리는 남학생에 관해서 물었고, 고등학교 때는 같은 학교였기에 돌려서 캐물었지만, 노아와 자신은 그저 친구라는 답 이외엔 없었다. 물론 단순히 이성 친구라 그런 것이 아닌, 노아의 태도가 묘하게 달랐기에 계속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좋아했는지부터 왜 아직도 그냥 친구로만 지내는지까지 전부 말해주고 있었다. 그랬기에 장장 1시간 동안 풀어낸 매니저의 짝사랑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친구들의 얼굴 주위로 물음표가 가득 떠올랐다. 친구 하나가 나머지 친구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면… 쟤네 쌍방 아니야?”

   “…그러니까. 둘 다 눈치도 빠른 애들인데 이게 뭐냐…”

 

   그렇게 두 사람은 어이없음을 토로하다 순간 눈을 마주쳤고, 이내 좋은 생각을 떠올랐다. 다음날 술이 깬 매니저에게 욕을 바가지로 들어먹으면서 칭찬도 같이 들을 수 있는, 아주 재밌는 생각 말이다. 술에 취해 벽이 허물어진 매니저에게 휴대전화를 빌려달라고 했고, 매니저는 활짝 웃으며 친구니까 빌려준다며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비밀번호까지 친절하게 풀어준 상태였다. 친구들은 신이 난 얼굴로 매니저의 전화를 이용해 노아에게 통화를 걸었다. 두 번 정도의 신호음이 들린 뒤, 노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 시간에 바로 받는 거 봐. 진짜네. 친구들은 다시 한번 키득거렸다.

 

   “응, 매니저. 무슨 일이야?”

   “안녕, 노아~ 졸업하고 나서 처음이네.”

   “그래, 안녕? 오래간만이야. 근데 매니저 무슨 일 있어?”

   “아, 얘가 엄청 취했거든. 혹시 밖이면 얘 데리러 올 수 있을까? 너 매니저랑 옆집 살잖아.”

   “흠. 알았어, 카톡으로 주소 찍어줘. 금방 갈게.”

 

   친구들이 알았다는 대답을 하자마자 뚝. 전화가 끊겼다.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노아가 늘 상냥하긴 했지만, 그 상냥함은 매니저를 향한 것에서 무조건 한 숟가락 덜어낸 것이라는 사실은 매니저 빼고 정말 다 알았었다. 지금도 딱히 다를 건 없었다. 친구들은 그새 테이블에 뺨을 붙인 채 색만 살굿빛이고 엄청나게 뜨거운 볼을 식히는 매니저에게 말했다.

 

   “매니저~ 노아가 너 데리러 곧 온대.”

   “노아…가 왜 와?”

 

   매니저가 눈을 느리게 껌뻑이며 제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응, 노아가 너 옆집 사니까 데리러 오라고 했어.”

   “… 노아 이제 옆집, 안 사는데에…”

   “뭐?”

   “걔… 우리 학교 근처로… 이사, 갔어…”

 

   친구들은 또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럼, 노아 걔는 옆집 살지도 않는데 데려다주겠다고 한 거야? 정말… 그들이 보기엔, 아니,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얘네 이거 서로 좋아하는 거 아닌가요?’하고 물었을 때 백이면 백 ‘네,’라고 대답할 상황이었다. 그들은 그저 헛웃음을 치며 소주를 따라 그대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아, 술이 다네… 내 눈물은 짜고… 얘넨 짜증 나…

 

 

 

* * *

 

 

 

   30분이 지나 술집 근처에 도착한 노아는 제가 들고 온 선물을 바라보았다. 꽃은 시들까 걱정되어 만나기 전에 사두려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포장해둔 립스틱과 향수만 들고 급하게 집을 나섰다.

 

   “…오늘 일찍 만나서 전해주려고 했는데. 결국에는 못했네.”

 

   며칠 동안 매니저가 묘하게 자신을 피하고 있는 건 알았다. 왜냐면 혹시 오늘 언제 시간 되냐는 노아의 말에 모호한 답만 흘린 이후 아무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의 매니저는 모호하지 않게, 그리고 제 상황에 맞게 딱 대답해주었다. 노아는 그렇게 잘 표현하던 매니저에게 대체 자신이 뭘 잘못한 건지 곰곰이 생각하며, 친구들이 알려준 술집을 향해 걸어갔다. 아. 저 멀리 묘하게 서 있는 모양새에서부터 술 냄새가 나는 한 사람과 그저 웃으며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노아는 급하게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고마워, 얘들아. 매니저는 내가 잘 데려다줄게.”

   “너니까 믿고 맡기는 거다, 아니었으면 절대 안 돼. 알지?”

   “응. 알지, 너희도 잘 들어가고.”

   “근데, 너 매니저 옆집 이제 아니라며? 왜 아무 말 안 했냐?”

   “음, 매니저니까?”

   “웩, 그래. 물어본 내가 죄인이다. 우리 애 잘 데려다주고. 우린 이만 간다.”

 

   친구들이 노아에게 손을 흔들며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갔고, 노아는 매니저의 어깨를 붙들며 말을 걸었다.

 

   “매니저, 나 왔어.”

   “으응…? 노아, 다…”

 

   저를 부축하고 있는 게 노아라는 걸 알아챈 매니저의 얼굴엔 미소가 활짝 피었다. 그와 동시에 노아는 순간적으로 얼어 붙어버렸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미소라 면역력이 사라진 것이 틀림없었다. 노아는 주체하지 못하고 빠르게 뛰는 제 심장 소리를 외면한 채, 여전히 술에 잔뜩 취한 매니저를 이끌어 근처의 작은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 앉자. 으응…. 노아가 여기 앉으라는 의미로 가볍게 어깨를 내리누르자, 매니저는 별다른 말 없이 얌전히 공원 정자에 앉았다. 아무리 봐도 이 상태로 두면 안 될 것 같아, 노아는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을 다녀오기로 했다. 입에 물려줄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 와야지. 그렇게 생각한 노아는 매니저에게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당부했다. 평소의 매니저가 아닌 술에 취한 매니저였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어디 가면 안 돼, 알았지?”

   “당연하지… 노아도 꼭 다시 와야, 해…”

 

   술에 취하면 말이 느려지는 매니저의 버릇이 여실히 느껴지는 빠르기였다. 노아는 피식 웃은 뒤, 얼른 편의점으로 향해 탱크보이 두 개를 계산해 들고나왔다. 다녀와서 공원에 놓여 있는 시계를 보니 어느새 분침이 숫자 12와 만나기 직전이었다. 그건 매니저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우선 노아는 탱크보이의 포장을 까서 매니저의 입에 넣어주었다. 취한 와중에도 야무지게 잘 먹는 매니저를 바라보다, 제 손에 들려 있는 선물을 건넸다. 생일이 지나기 전에는 전해주고 싶었다.

 

   “매니저.”

   “응…”

   “20살 생일 축하해.”

 

   매니저는 제 앞에 보이는 봉투를 바라보았다. 취한 상태라 사리 분별을 하기도 귀찮았지만 이건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며칠 전 노아가 들고 있던 봉투들이 분명했다. 순간, 매니저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취한 탓에 감정이 격해진 모양이었다. 노아는 몇 초간 눈을 껌뻑거리다가 매니저가 눈가를 벅벅 닦자, 급한 대로 매니저의 손을 치우고 제 두 엄지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살살 쓸어주었다.

 

   “왜 울어, 울지 마…”

   “허엉, 나는 노아 네가, 다른 여자 생긴 줄, 알고…… 걱정했는데…”

   “…응? 다른 여자라니?”

 

   안 그래도 아이스크림 덕분에 서서히 취한 정신이 맨정신으로 돌아오는 기점이었다. 그렇기에 매니저는 노아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기에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를 최대한 빨리 굴리려고 노력했다.

 

   “어, 그게…”

   “무슨 의미야? 알려줄래?”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노아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소주를 연달아 들이킬 때도 붉어지지 않았던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매니저는 밤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보았지만, 옅은 녹색 눈동자에 담긴 집요함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게, 있잖아. 며칠 전에 자취방 갔을 때, 네가 그거 들고 있는 거 봤거든. 근데 넌 누구한테 립스틱 같은 거 안 주잖아… 그래서 여자 생겼나 해서…”

   “흐음, 왜 여자 생긴 게 걱정이었는데? 그러면 그것 때문에 나 피한 거야?”

 

   매니저는 여러모로 정곡을 찔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매니저의 모습을 보자 노아는 왠지 모를 확신이 생겨 충동적으로 예정에 없던 말을 뱉고 싶어졌다. 비록 충동적이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품고 다녔던 말. 속으로는 수십 번, 수백 번, 혹은 그 이상 되뇌었던 그 말. 노아는 그 말을 오늘에서야 꺼내기로 했다.

 

   “있잖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여자는 없어. 그냥 친구들일 뿐이지.”

   “그렇지만 나도, 네 친구잖아.”

   “음, 나는 매니저를 친구로서도 좋아하고 이성으로서도 좋아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뭐?”

   “응? 나 매니저 좋아한다고.”

 

   노아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매니저는 그대로 굳었다. 지금껏 저만 노아를 바라보는 줄 알았다. 지금껏 저만 애가 타는 마음을 꼭꼭 눌러 삼키고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너와 나는 마주 보고 있었구나. 매니저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한번 쏟아지기 시작했다. 술은 깬 지 오래였다. 이건 10년 동안 그 마음을 알아채지 못해 흘리는 슬픔의 눈물인지, 아니면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확인해 흘리는 기쁨의 눈물인지, 매니저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입술을 꾹 깨물며 조용히 울었다. 노아는 그런 매니저의 입술에 손을 대 깨물지 못하게 했다.

 

   “입술 깨물지 마, 아프잖아.”

   “나도 너, 좋아해.”

 

   결국 매니저의 입에서도 그 말이 튀어나왔다. 오랜 시간 아껴왔던 그 마음, 평생 내뱉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매니저의 진실한 속마음이 노아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한참을 바라본 사람에게 저도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을 듣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노아는 알고 보니 자신이 생일이 아니었나, 순간 착각을 할 만큼 행복했다. 그래서 활짝 웃으며 매니저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꼭 끌어안아 본 게 아무 생각 없던 어린 시절이 마지막이었던 거 같은데, 이리 안으니 생각하던 것보다 더 좋았다.

 

   “그럼 매니저,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거야?”

   “그, 그 말을 꼭 해야 해?”

   “응? 중요하잖아. 난 이제 매니저를 아무 때나 안을 수 있어서 좋아.”

   “노아 너 진짜…!”

   “싫으면 안 할게.”

   “……니야.”

   “뭐라고?”

   “그건 아니, 라고…”

 

   매니저의 뺨이 다시 한번 붉게 달아올랐고, 노아의 입에서는 절로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다가 의문이 생긴 매니저가 노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선물은 뭐 준비한 거야?”

   “립스틱, 향수, 그리고 못 사 왔는데 꽃도 있었어.”

   “엥, 그게 무슨 조합이야?”

   “성년의 날에 주는 선물인데, 키스만 립스틱으로 바꿨어.”

   “키, 키스…”

   “응? 왜? 혹시 립스틱이 싫은 거야? 립스틱 말고 키스해줄까?”

 

   노아가 행복에 잠기니 평소보다 웃음이 더 능글맞아져 있었다. 그런 웃음을 매니저에게 보여주며 매니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매니저는 훅 치고 들어온 노아의 말에 화들짝 놀라 제 앞에 놓인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렸다.

 

   “미쳤나 봐, 진짜!”

   “하하, 난 진심이었는데. 조금 서운하네.”

 

   볼이 홧홧해진 매니저는 손으로 얼굴을 식히며 노아와 시선을 겹치지 않기 위해 아예 몸을 돌려버렸다. 하지만 노아는 신경 쓰지 않고 매니저의 어깨에 제 머리를 살포시 기대었다. 매니저는 몸을 돌려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대신 심장이 터질 거 같은 마음을 한숨에 섞어 푸, 내쉬었다. 그리곤 도심 한가운데라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아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계속 엇갈림만 반복하던 두 사람이 드디어 만난 여름의 밤이 깊어갔다.

AFTER L!FE LIPSTICK COLLABO - 립스틱 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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