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이한 결혼식
기이 X 매니저
꾸벅, 꾸벅 기울어지던 고개가 무너질 듯 꺾이면 기이의 손이 매니저의 볼을 감싸고 기대게 했다.
매니저는 흠칫 고개를 들며 눈을 떴다. 눈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아직 감싸고 있는 듯 멈춰있는 기이의 손바닥, 따스하게 내려쬐는 햇살, 무릎 아래로 길게 늘어진 웨딩드레스. 그와 비슷하게 새하얀 턱시도를 갖춰입은 기이까지. 이게 무슨 상황이지? 매니저는 눈을 몇 번 깜빡여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들었나? 잠들었다가 깬 건가? 기이의 손이 볼에서 옮겨져 몸을 지탱하고 있는 손 위로 겹쳐온다. 매니저가 당황함에 손을 빼려는 순간 제대로 다시 잡아왔다. 제법 큰 손이 가볍게 그녀의 손을 품었다.
"깨어나셨군요, 마스터."
기이의 붉은 눈이 눈꺼풀 사이로 숨겨지고 눈꼬리며 입꼬리까지 휘어진다. 매니저는 기이의 표정에 벙 찌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기이가 이런 표정을 쉽게 지었던가? 그보다, 웃는 얼굴이 이렇게 포근했던가? 풀리지 않는 의문만 표정 위를 둥둥 떠다녔다. 혼란스러움이 그득한 매니저의 표정에 기이가 평소 장난칠 때 짓던 짖궃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영영 깨어나지 않으실까 걱정했습니다. 후후.."
"어..나 꿈꾸고 있나?"
"이게 꿈이라면 제게 너무 잔인한 벌이겠군요."
"나랑 이런 옷 입고 있는 게 더 벌받는 느낌은 아닐까?"
"그럴리가요. 마스터는 항상 저를.."
"너를?"
"뒷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들려드리죠. 돌아갈 시간입니다."
"응? 어딜?"
"글쎄요."
저희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해두죠. 기이는 몸을 일으켜 이어져있는 손을 가볍게 끌었다. 매니저는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서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 복장으로 어딜가는데…! 웨딩드레스가 바닥에 끌리고 그의 구두굽 소리가 홀에 울리면 둘은 하얗고 아름다운 식장 안으로 사라져갔다.
***
"으아..이게뭐야.."
"어디 불편한데는 없으세요?"
"아..네.."
"산책은 잘 하셨어요? 신랑분이 얼마나 원하시던지.."
"아..신랑이요.."
임무 중인건가? 하지만 기이 말고는 다른 사신은 아무도 없었다. 혼란스러움이 매니저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진짜 꿈인가? 그렇다기엔 너무 사실적이다. 매니저는 손을 감싸고 있는 하얀 장갑으로 이마를 짚었다. 벤치에서 자신의 볼을 감쌌던 기이의 온기가 생각나자 문득 심장이 크게 울렸다. 심장이 왜 이렇게 뛰지…….
"신부님 준비 다 됐어요!"
신부님. 매니저는 어색한 호칭에 귀 끝이 달아오른다. 신랑이 기이고, 신부가 자신이라니. 정말 말도 안된다. 매니저는 자신도 모르는 임무에 참여중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요즘 야근이 많아서 그런 것이다, 피로가 꽤 많이 쌓였나보다. 그런식으로 생각을 지우려고 애썼다. 하지만 웨딩드레스며 머리칼 위로 얹어진 면사포가 간질, 간질 심장을 두드렸다. 무슨 임무가 이렇게 본격적이야.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발 끝까지 울리는 것만 같다. 매니저는 직원의 손길을 따라 발을 옮겼다.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뜨거운 박수로 맞이해주십시오."
하객석에서 울리는 박수와 환호소리에 귀 끝이 달아오른다. 모르는 사람 투성이야, 눈으로 아무리 많은 하객들을 살펴도 익숙한 얼굴은 하나도 없다. 매니저는 하객석에서 눈을 떼었다. 허공을 맴돌던 불안에 찬 시선은 이윽고 반대편에서 걸어나오는 기이에게로 꽂혔다.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칼이 그의 발걸음마다 가볍게 살랑였다. 천천히 여유로운 걸음으로 내딛은 발이 매니저 옆에 서서야 멈췄다. 부케를 들고있느라 살짝 벌어진 팔과 옆에 선 기이의 팔이 맞닿자 괜히 그 부분만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서 매니저는 몸을 살짝 움츠렸다. 자연히 멀어진 거리에 기이의 시선이 잠시 매니저의 어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신랑은 신부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주례의 물음에 고개를 든 기이가 잔잔히 미소를 띄운 얼굴로 맹세를 입에 담았다. 그는 답을 마치며 매니저와 시선을 맞추었다. 매니저는 기이의 시선을 마주하며 이어지는 주례의 물음에 입술을 달싹였다.
"신부 또한 신랑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 세합니다."
임무중이니까, 매끄럽게 넘어갈 상황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며 매니저는 부끄럼을 감수하고 같은 대답을 했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사랑을 맹세하다니, 매니저는 볼에 화끈 열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제 두분은 맹세의 증거로 반지를 나눠끼고, 입맞춤을……."
하객석에 아는 얼굴이 없어서 불안했던 마음이 다행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다른 사신들이 기이와 자신이 결혼하는-짜여진 상황이라도-순간을 보고있다 생각하면 어째서인지 온 몸이 붉게 달아올라도 숨기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례의 목소리가 점점 귀에서 멀어지고 심장소리가 귓 속을 가득 채웠다. 결혼을 해본적이 없어서일까, 괜히 더 긴장되는 탓에 기이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시선이 쏠렸다. 기이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어느새 반지를 들어 매니저의 손가락 끝을 살며시 잡았다.
"마스터, 제게 입맞춤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어? 진짜로..하게?"
"마스터에게만큼은 늘 진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잠깐.."
"저는 오늘을 잊지 못할겁니다. 영원히."
왼손 네번째 손가락 안쪽으로 반지가 밀려들어옴과 동시에 기이의 숨이 단숨에 가까워졌다. 매니저의 벌어진 입술과 천천히 맞물리는 기이의 입술이 긴장으로 옅게 떨린다. 매니저는 기이의 숨과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입술의 온기를 느끼며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여유로운 표정이라 긴장은 하나도 안했을 거 같은 그였는데, 맞닿은 입술이 떨고있어서 괜히 웃음이 났다. 매니저의 입꼬리가 올라가고서야 기이는 긴장을 놓은듯 매니저의 목덜미와 허리를 가볍게 감싸안았다. 그저 입술만 닿고있을 뿐인 짧은 키스임에도 그 순간만큼은 그가 살아왔다던 영원을 느꼈다. 기이의 입술이 떨어지고, 그의 손이 내밀어질 때까지 매니저는 달아오른 얼굴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스터, 제 손에도 끼워주시죠."
"아..으응. 그, 그래야지!"
이젠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되지않아 정신이 쏙 빠진 매니저를 향해 기이는 웃음을 흘렸다. 허둥대며 기이의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의 다른 한짝을 끼워넣은 매니저가 그를 올려다보면, 기이는 놓을 듯 말듯 아슬한 거리의 손 끝을 좁혀 파고들었다. 단번에 깍지를 낀 손 위로 두 개의 반지가 양쪽에서 환하게 빛나면, 하객석은 환호와 박수로 물들어갔다.
***
"그럼 신혼여행을 위해 떠날 두 사람에게 끝까지 축복의 박수를 보내주세요!"
주례자의 말에 하객들은 옹기종기 모여서서 기이와 매니저가 타고있는 차를 향해 박수와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차 시트에 몸을 기대면서도 매니저는 여전히 이 상황이 진짜인지 환상인지 분간이 되질 않아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기이의 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매니저의 손을 끌어왔다.
"마스터, 무슨 고민이라도?"
"아니..아무리 생각해도..이럴리가 없는데.."
이해가 안간다. 지금 이 상황이. 매니저는 기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엉킨 것들을 굴려내었다. 여전히 이 상황이 어색하고, 기묘할 뿐. 어떠한 답도 내려지지 않았다. 임무가 아니라면 정말 기이와 내가... 매니저는 기이의 붉은 눈이 자신에게 고정된 채 머무르면 홱, 고개를 돌려내었다. 키스도 했고, 이대로 신혼여행을 가게된다면... 밤에는...
"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여보."
쪽, 기이의 입술이 어느새 손등에 닿았다 떨어지고 그의 웃는 얼굴이 매니저의 눈에 가득 담긴다. 매니저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남은 한 손으로 감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세상이 어둠으로 변했다.
***
"헉..!"
이불을 걷어차며 요란스럽게 일어난 매니저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할새도 없이 주위부터 살폈다. 서류가 널부러진 책상 위, 끄는 걸 잊은 작은 스탠드, 침대 옆 탁자엔 읽다 만 책이 펼쳐져있고 그 위에 뚜껑이 열린 작은 향수 하나가 놓여있다. 향수병은 못 보던건데……. 매니저가 향수병을 집어들면 그 아래엔 작은 메모지가 드러났다.
‘요새 통 잠을 못 주무시더군요. 마스터. 이 향수를 뿌리고 주무시는 건 어떻습니까? 효과는 아주 좋습니다 후후..무슨 효과인지 궁금하십니까? 숙제입니다. - G -’
무슨 효과인지는 안 적혀있잖아.. 매니저는 기이가 남긴 메모를 유심히 보다가 향수를 다시 그 위에 얹어두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다시 잠들기 위해 스탠드를 끄고 이불에 누운 매니저는 한참을 뒤척이다가 결국 스탠드를 다시 켰다. 향수를 집어든 작은 손은 이내 칙, 칙, 의심없이 이불에 향을 뿌려대었다. 향수를 다시 내려놓은 매니저는 누가 볼세라 빠르게 스탠드 끈을 잡아당겨 불을 껐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포근한 향이 퍼지면 매니저는 이윽고 눈을감고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기이와 함께한 결혼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향수를 통해 꿈으로 그를 불러왔다.
"마스터는, 항상 저를...기대하게 만드는군요."
계속, 미래를 바라도록 말입니다. 꿈 속의 기이는 숨길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잠든 매니저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었다. 손에 얽히는 부드러운 감촉이 한참을 그의 손에 감겨왔다. 불면을 소화하여 욕망을 꿈으로 실현시키는 향수는, 성공인걸로 할까요.
"그러니,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제 미래에 계속 있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스터."
기이는 얽고있던 머리칼을 그대로 입가로 가져와 가벼이 입술을 놓고 꼬리를 올려내었다. 기이한 결혼식은 이제야 서막을 올리기 시작했다.